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 텔레스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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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 텔레스의 만남

by sojeoing.tea 2024. 5. 2.

플라톤주의

플라톤주의(Platonism)는 다른 말로는 플라톤 철학(Platonic philosophy) 또는 플라톤 철학 전통이라고도 한다. 플라톤주의는 플라톤(428/427~348/347 BC)의 철학을 지칭하거나 또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특히 유래한 것으로 간주되는 다른 철학의 체계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좁은 의미로는 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실재론(Platonic realism)을 의미한다.

플라톤주의의 중심 컨셉트는 이데아론(Theory of Ideas)이다. 이데아론은 다른 말로는 원형 이론(原形理論, Theory of Forms) 또는 형상 이론(形相理論, Theory of Forms)이라고도 한다.[1] 플라톤주의의 이데아론에 따르면, 매일의 일상 세상의 사물들의 본래의 모습은 초월적이며 완전한 원형(原形, archetypes)이며, 물질 세상의 사물들은 그 원형들 즉 형상들(forms) 또는 이데아들(ideas)의 불완전한 복사체(複寫體)이다.[2] 그리고 가장 완전한 형태의 원형 또는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Form of the Good: 선한 존재라는 지고한 이데아)인데, 이 선의 이데아는 모든 다른 원형들 즉 이데아들이 나오는 근원이 된다. 그리고, 플라톤주의자들은 이 선의 이데아를 이성(理性)에 의해 알 수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428/427~348/347 BC)은 고대 아테네에 기원전 387년 경에 철학 학교인 아카데미아를 열었는데, 플라톤주의에 대한 시기 구분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지 않고 플라톤의 사망 년도인 기원전 347년을 기점으로 하여 크게 다음의 세 시기로 구분한다.

아카데미아 시대
고(古)아카데미아 시대: c. 347~266 BC
중기 아카데미아 시대: c. 266~160 BC
신(新)아카데미아 시대: c. 160~84 BC
중기 플라톤주의: c. 130 BC~AD 2세기 후반
신플라톤주의: AD 3세기에 시작
플라톤의 사후로부터 기원전 266년까지의 기간을 고(古)아카데미아(c. 347~266 BC) 시대라고 한다. 기원전 3세기에 아카데미아의 6번째 교장이었던 아르케실라오스(Arcesilaus: c. 316~c. 241 BC)는 철학적 회의론을 채택하면서 중기 아카데미아(c. 266~160 BC)를 설립하였다. 아르케실라오스의 회의론적 학풍은 신(新)아카데미아(c. 160~84 BC) 시대를 거쳐 기원전 90년경의 안티오코스(Antiochus: c. 130~68 BC) 때까지 계속되었다.

안티오코스는 스토아 철학(BC 3세기~AD 2세기)의 요소들을 도입하고 철학적 회의론을 배격하면서 중기 플라톤주의(c. 130 BC~AD 2세기 후반) 시대를 열었다.

기원후 3세기에, 플로티노스(c. 204~270)는 신비주의적인 요소들을 추가하여 신플라톤주의를 확립하였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지고한 존재는 만물의 근원인 존재인데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이 지고한 존재를 '모나드(Monad)' 즉 '하나인 존재(the One: 하나)', 또는 '선한 존재(the Good: 선)'라 불렀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영혼이 덕과 명상을 통해 자신을 상승시켜 '하나인 존재'와 자신을 합일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플라톤주의는 서양의 사상과 신앙 체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플라톤주의 컨셉트들이 정통파 기독교 교회와 나스틱파(Gnostics, 영지주의자)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이들은 플라톤주의의 중심 컨셉트인 원형들 즉 이데아들을 신의 생각들(God's thoughts: 하느님의 생각들)이라고 이해하였다. 한편, 신플라톤주의는 특히 기독교 신비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

아리스토텔레스(고대 그리스어: Ἀριστοτέλης, 그리스어: Αριστοτέλης 아리스토텔리스[*], 영어: Aristotle 애리스터틀, 기원전 384년 ~ 322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다. 물리학, 형이상학, 시,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 정치, 윤리학, 도덕 과학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저술하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으며, 그리스 철학이 현재의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도덕과 미학, 논리와 과학, 정치와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도움으로 리케이온 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동물원도 만들었다.[1] 자연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중세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그의 견해는 뉴턴 물리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되는 르네상스 시대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동물학 연구에서 그의 관찰은 19세기까지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의 글에는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논리에 대한 형식 연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그의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형식 논리학으로 구체화되었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800년 ~ 1400년까지의 중세시대 유대와 이슬람 전통에서 나타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초대교회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서방교회 전통의 스콜라 철학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윤리학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 덕 윤리학(virtue ethics)의 출현과 더불어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모든 측면은 오늘날에서 계속해서 활동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스승 플라톤이 관념론적 이상주의임에 대하여 경험론적 현실주의자로 지적되고 있으며, 예술에 관해서도 플라톤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예술을 일종의 '모방'으로 보는 점은 플라톤과 같으나, 플라톤이 '모방의 모방'으로 생각하여 이데아의 참된 인식을 흐려 놓는 것으로 인정한 데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을 카타르시스(정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1]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러 편의 품위있는 논문과 대화록을 저술했음에도(키케로는 그의 문체를 "황금이 흐르는 강"이라고 묘사하였다.) 오늘날 그가 쓴 글의 대부분은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 쓴 글의 3분의 1 정도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