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이는 유용한 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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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이는 유용한 지침

by sojeoing.tea 2024. 5. 4.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영어: Epicurus, 그리스어: Έπίκουρος, 기원전 341년 사모스 – 기원전 271년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에피쿠로스 학파(Epicurianism)라 불리는 학파의 창시자다. 에피쿠로스는 300여 권 저술 활동을 했는데, 그 가운데 몇 권만 전해진다. 알려진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 대부분은 후대 추종자나 해설자에서 유래한다.

에피쿠로스에게서 철학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데 있었다. 그가 말하는 행복하고 평온한 삶은 평정(ataraxia), 평화, 공포로부터의 자유, 무통(無痛, aponia)의 특징이 있다. 그는 쾌락과 고통은 무엇이 좋고 악한지에 대한 척도가 되고,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신은 인간을 벌주거나 보상하지 않고,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는 빈 공간을 움직이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쳤다.

 

생 애

에피쿠로스의 생애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 전기 제10권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의 부모 네오클레스(Neocles)와 카이레스트라테는 모두 아테네 출생이었으며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41년 2월에 소아시아의 사모스 섬에서 출생하였다. 시민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에피쿠로스가 태어나기 십년 전에 에게해의 사모스 섬으로 이주했다. 그는 소년시절 플라톤 학자인 팜필루스 아래에서 4년동안 철학을 공부했다. 18살에 2년 동안 아테네에서 군인으로 복역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난 뒤 즉위한 페르디카스는 사모스섬의 아테네인 이주민들을 콜로폰(Colophon)으로 이주시켰다. 군 복무를 마치고 에피쿠로스는 콜로폰에서 가족과 합류하게 된다. 이후 그는 자연주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제자인 나우시파네스(Nausiphanes) 아래에서 공부한다. 기원전 311년과 310년에 에피쿠로스는 미틸리니에서 강연을 했으나 이에 대해 반발이 생겼고 그는 미틸리니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그는 람프사쿠스(Lampsacus)에서 학교를 세웠고 기원전 306년에는 아테네에서 그의 학파가 만남의 장소로 사용했던 ‘정원’(the Garden)을 만들었다.

 

그의 많은 사상이 그 이전의 철학자들, 특히 데모크리토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그는 결정론에 관해서는 데모크리토스와 의견을 달리했다. 그는 그가 다른 철학자들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했으며 다른 철학자들을 비난했고, 그는 의견들을 스스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아이도 없다. 그는 요로결석을 앓았고, 이는 그가 기원전 270년 결국 사망하는 원인이 된다. 요로결석의 굉장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는 이도메네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나는 이 편지를 내 삶의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기분 좋은 날에 쓰네. 소변을 볼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인데다가 세균성 이질까지 겹쳐 내 고통은 더 이상 심각해질 수 없을 정도네. 그렇지만 내 철학적 사색들로부터 오는 기쁨이 이 고통을 상쇄시켜준다네. 자네에게 부탁하네. 메트로도루스(Metrodorus)의 아들을 잘 돌봐주게. 그 젊은이가 내게, 그리고 철학에 보여준 헌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네."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는 규모는 작지만 매우 헌신적으로 그를 추종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초기 멤버에는 Hermarchus, Idomeneus, Leonteus, 그의 아내 Themista, 풍자 작가 Colotes, 람사쿠스의 수학자 Polyaenus와 Metrodorus가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여성을 예외가 아닌 정식으로 받아들인 첫 학파였다. 이 학파는 원래 에피쿠로스의 집과 정원에서 열렸다. 정원으로 통하는 문에 있는 조각은 세네카의 편지 중 하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방황하는 나그네들이여, 여기야말로 당신이 거처할 진정 좋은 곳이요. 여기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善) 즐거움이 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을 행복의 재료로 중요히 여겼고, 학교는 친구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라 종종 비유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계급을 매겼고, 그들이 그의 교의에 맹세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에피쿠로스의 생애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 전기 제10권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의 부모 네오클레스(Neocles)와 카이레스트라테는 모두 아테네 출생이었으며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41년 2월에 소아시아의 사모스 섬에서 출생하였다. 시민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에피쿠로스가 태어나기 십년 전에 에게해의 사모스 섬으로 이주했다. 그는 소년시절 플라톤 학자인 팜필루스 아래에서 4년동안 철학을 공부했다. 18살에 2년 동안 아테네에서 군인으로 복역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난 뒤 즉위한 페르디카스는 사모스섬의 아테네인 이주민들을 콜로폰(Colophon)으로 이주시켰다. 군 복무를 마치고 에피쿠로스는 콜로폰에서 가족과 합류하게 된다. 이후 그는 자연주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제자인 나우시파네스(Nausiphanes) 아래에서 공부한다. 기원전 311년과 310년에 에피쿠로스는 미틸리니에서 강연을 했으나 이에 대해 반발이 생겼고 그는 미틸리니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그는 람프사쿠스(Lampsacus)에서 학교를 세웠고 기원전 306년에는 아테네에서 그의 학파가 만남의 장소로 사용했던 ‘정원’(the Garden)을 만들었다.

 

그의 많은 사상이 그 이전의 철학자들, 특히 데모크리토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그는 결정론에 관해서는 데모크리토스와 의견을 달리했다. 그는 그가 다른 철학자들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했으며 다른 철학자들을 비난했고, 그는 의견들을 스스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아이도 없다. 그는 요로결석을 앓았고, 이는 그가 기원전 270년 결국 사망하는 원인이 된다. 요로결석의 굉장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는 이도메네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나는 이 편지를 내 삶의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기분 좋은 날에 쓰네. 소변을 볼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인데다가 세균성 이질까지 겹쳐 내 고통은 더 이상 심각해질 수 없을 정도네. 그렇지만 내 철학적 사색들로부터 오는 기쁨이 이 고통을 상쇄시켜준다네. 자네에게 부탁하네. 메트로도루스(Metrodorus)의 아들을 잘 돌봐주게. 그 젊은이가 내게, 그리고 철학에 보여준 헌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네."

 

 사 상

그는 자연학에 있어서는 원자론적 유물론을, 윤리학에 있어서는 쾌락주의를 주장하여 쾌락주의 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쾌락은 방탕자의 환락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특히 순간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했던 퀴레네 학파와는 달리, 지속적이고 정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아타락시아'란 바로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널리 퍼져서 종교처럼 되고 큰 영향을 끼쳤다.

 

 과하과 윤리 예견

에피쿠로스는 직접적인 관찰과 이론적인 추론으로 시험된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과학과 과학적 방법의 발전에서 중요한 인물이 된다. 그의 자연과 물리에 대한 많은 생각들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학적 개념들을 예견했다. 그는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의 중국, 인도, 이란, 근동, 고대 그리스에서 혁명적인 생각이 나오던 시대의 중요 인물이었다. 그의 상호관계에서의 윤리에 대한 주장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최초였으며 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한 사람에게의 피해의 최소와 다른 사람에게의 최대의 행복을 강조함으로써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의 공식화와 구별되었다.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그와 동시대의 그리고 그 이전의 다른 그리스 철학자들과는 다른 사상이었으나,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이 가졌던 여러 원칙과 같은 원칙들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처럼 그 또한 세상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조각(atoms, 그리스어: atomos, 나눌수 없는)들이 빈 공간(khaos)을 떠다니는 것이라고 믿은 원자론자(atomist)였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원자들이 아무런 계획이나 목적 없이 충돌하고 되튀며, 서로 부착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들이라고 그는 설명했다.(현대의 물질관과 비교해보라) 하지만 그는 그 입자들의 운동이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가끔 방향이 바뀐다고 말했다는 점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는 달랐다. 이것은 이전의 원자론에서는 필연적이었던 결정론을 피하고 세상에 자유 의지를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과 비교해 보라)

 

그는 정기적으로 여성들과 노예들을 그의 학파에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인에게 근본적인 인간 평등사상을 소개했다. 또한 그는 당시에 흔하던 신을 두려워하고 신을 숭배하는 전통을 깨뜨린 최초의 인물들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교적 활동을 신을 생각하며 그들을 하나의 행복한 삶의 예시로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에피쿠로스는 전통적인 그리스 종교 활동에 참여했으나 신에 대해 거짓된 생각을 갖는 것은 잘못됐다고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신들은 불사의 존재이며 축복받은 존재이고, 이 이외에 그 어떤 부가적인 가치를 신에 부과하는 것은 불경한 행위이다. 신은 우리가 흔히 믿는 것처럼 나쁜 자를 벌하고 착한 자에게 상주지 않는다. 대중들은 신이 사악한 인간에게는 악을 주고, 신을 모델로 삼아 올바른 생활을 하는 인간들에게는 축복을 준다고 믿지만 에피쿠로스는 실제로 신들은 인간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믿었다. 불경한 자는 대중이 숭배하는 신을 부정하는 자가 아니라 신에 대해 대중이 믿는 대로 단언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쾌락은 고통의 부재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모든 선하고 나쁜 것은 쾌락과 고통의 지각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다. 좋은 것은 기쁜 것이고, 나쁜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쾌락과 고통은,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선함과 악함의 궁극적인 도덕적 기준이다. 만약 고통이 쾌락보다 더 큰데도 그것이 선택되었다면 그것은 그것이 결국에는 더 큰 쾌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가 무분별한 쾌락의 추구를 지지했다고 흔히 오해받지만, 그가 진실로 원했던 것은 고통의 부재-죽음의 공포와 신의 응보로부터 자유로운 만족감과 고요함의 상태-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고통으로 괴롭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쾌락이 필요없고,‘완벽한 마음의 평화의 상태가 된다.’

유산

에피쿠로스 철학의 요소들은 서양 지식 역사상 다양한 방법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재포장되고 공명되어 왔다.

원자에 대한 것(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와 같은)과 마가레트 케빈디쉬의 자연철학은 에피쿠로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가 강조한 상호 이익에서의 그의 공식인 고통의 최소화와 행복의 최대화는 나중에 프랑스 혁명 때의 민주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채택되었고, 사람은 ‘삶과 자유, 그리고 성질’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쓴 존 로크 같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로크에게, 한 사람의 몸은 그들의 성질이고, 한 사람의 성질에 대한 권리는 그 사람의 소유물과 마찬가지로 안전이 보장되어야 했다.

이 세 가지는, 에피쿠로스의 평등주의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아버지인 토마스 제퍼슨의 미국인들의 자유 운동과 독립 선언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와 ‘삶과,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권의 불가침 권리’에 나타내져 있었다. 제퍼슨은 본인을 에피쿠리안으로 생각했다.

인간오성론에서, 데이비드 흄은 에피쿠로스를 우리가 아는 신은 그의 창조가 그를 설명하는 것 보다 더 대단하다는 점에서 우리가 아는 신의 불가능함을 설명하는데 사용했다.

칼 마르크스의 박사 학위 논문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다.

에피쿠로스는 처음으로 사람의 자유는 원자의 운동의 비결정론에서 온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몇몇 철학자들로 하여금 에피쿠로스의 자유는 기회에 의해 생겨난다고 생각하게 했다. 루크레티우스의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에 따르면, 그는 이것이 에피쿠로스의 가장 잘 알려진 글이라고 했다. 그러나 메노이케우스에 쓴 그의 편지에 따르면, 에피쿠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랐고 사 가지 가능한 이유를 정리했다. - “몇 가지는 필요성에 의해서 생기고, 다른 것은 기회, 나머지는 우리의 조력자에 의해서 생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것들은 ‘우리에 의해서’ 생긴다고 했다. 에피쿠로스는 동의했고, 칭찬과 비난이 자연적으로 그것에 영향을 준다고 했다. 에피쿠로스에게, 기회는 원자가 결정론을 패배시키고 자주적으로 방을 나가려고 할 때 방향을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에피쿠로스는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 영감을 제공함으로서 고통과 죽음에 대한 유명한 회의론자들의 견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중 하나가프리드리히 니체이다. 니체는 그의 작품들을 쓸 때마다 에피쿠로스에 대한 자신의 친화도를 인용했다. 니체는 에피쿠로스의 고통스러운 얼굴 속에서도 활기참을 가지고 있는 철학을 매우 존경했다. 하지만, 긴장으로부터 느껴지는 자유와 같은 행복의 개념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