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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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철학

by sojeoing.tea 2024. 5. 2.

고대 그리스 철학(그리스어: Αρχαία Ελληνική φιλοσοφία)은 일찍이 고대 그리스에서 흥한 철학의 총칭. 현재에 말하는 철학 뿐만 아니라, 자연철학(물리학)이나 수학을 포함한 학문이나 학구적 영위의 총칭이다.

'철학(고대 그리스어: φιλοσοφία, philosophia, 필로소피아)' 및 '철학자(필로소포스)'라는 말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피타고라스라고 전해진다[1][2]. '철학자'를 포함한 '지자(소포스)'는 '소피스트(고대 그리스어: σοφιστής, sophistes, 소피스테스)'라고도 불려 시인도 여기에 포함되었다[3].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리스 철학의 기원을, 아낙시만드로스로부터 시작되는 이오니아 학파(엄밀하게는 밀레투스 학파)와 피타고라스로부터 시작되는 이탈리아 학파(피타고라스 교단)로 크게 나누어, 소크라테스(소크라테스 학파)나 플라톤(고 아카데메이아 학파)은 전자의 계보로, 파르메니데스, 제논(함께 엘레아 학파), 에피쿠로스(에피쿠로스 학파)들은 후자의 계보라고 주장하고 있다[4]. 한층 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철학에는 자연철학·윤리학·논리학의 세 개의 부문이 있으며, 우선 자연철학이 발달해, 그 다음에 소크라테스가 윤리학을 더해 제논이 논리학을 확립해, 윤리학에는 아카데메이아 학파, 키레네 학파, 앨리스 학파, 메가라 학파, 키니코스 학파, 에레트리아 학파, 궤변 학파(소피스트 등), 소요학파(페리파트스 학파),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라고는 10의 학파가 있었다고도 주장하고 있다[5].
일반적으로 탈레스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까지를 이 구분에 포함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이 부분의 본문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입니다.
기원전 6세기경의 그리스에서는 본토보다도 식민지에서 문화가 더 발달하였는데, 특히 그리스 민족 중의 한 종족인 이오니아 인이 이주한 소아시아 서해안의 식민지는 무역 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다른 여러 나라와의 접촉이 잦은 만큼, 전통적인 습속(習俗)이나 관념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학문 탄생의 모태인 자유 정신, 합리 정신이 출현하였다. 특히 이오니아 식민지의 중심 도시 밀레토스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는데, 철학의 할아버지라 불리는 밀레토스 출신의 탈레스와 그의 제자, 학우들로부터 그리스 철학의 제1기인 자연 철학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그들의 관심사는 외견상 잡다하고, 변화 무궁한 자연 현상의 근저에는 어떤 근본 물질, 즉 원질(原質)이 있어서 이 원질의 변형, 변화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하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이 원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였다. 탈레스가 세계의 원질은 ‘물’이라고 한 이후에, 아낙시만드로스는 원질을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는 '무한자(無限者)'라고 라고 하였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하였다. 피타고라스는 세계가 ‘수’(數)로 이뤄져 있다고 하였으며, 혹은 크세노파네스와 파르메니데스는 다(多)와 변화를 감각의 미망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불생불멸, 불변부동, 유일절대의 신(神) 혹은 '유(有)'를 주장하였다. 엠페도클레스는 어떤 한 개의 원질만 가지고서는 삼라만상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하여 원질을 ‘물’, ‘불’, ‘공기’, ‘땅’의 4종이라고 하였고, 아낙사고라스는 이 4종으로도 부족하다 하여 질적으로 상이한 무수한 '종자(種子)'를 원질이라 주장하였다. 끝으로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환원하고, 만물은 질적으로는 동일하나 오직 형태상으로만 차이가 있는 불가분할(不可分割)의 '원자(原子)'로부터 성립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 철학의 제1기는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나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가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자 자연계보다 인간계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이에 따라 그리스 철학은 제2기인 인간 연구의 시기로 들어가는데, 그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소피스트들이었다. 개인의 문제를 흥미의 중심으로 하고, 따라서 국가 전체를 분리하게 한 그들의 운동이 그리스 시대의 계몽 운동이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인은 자기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인민 집회(人民集會)나 법정(法廷)에 있어서, 상대편을 설복할 수 있는 교양을 간직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교양을 전수한 것이 소피스트들인데, 그때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체의 인식의 완전한 상대성이 철학상의 가정(假定)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부정(不正)도 정(正)으로 만들 수 있다"고 공언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그들의 철학에는 많은 부정적인 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적인 맹아(萌芽)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인간을 고찰의 중심으로 한 것은 인식론과 윤리학의 연구를 촉진시켰고, 또 학문, 법률, 도덕, 종교 등에 있어서의 일체의 보편타당성에 대한 소피스트적 부정이야말로 이러한 인류의 재보를 위한 전사로서의 소크라테스를 분기(奮起)시킨 기연(機緣)이 되었던 것이다.